찌는 듯 했던 불볕 더위에 지쳐 숨도 쉬기 어려웠던 게 겨우 일주일 전 얘기이건만, 언제 그랬냐는 듯 이제 날씨도 꽤 선선한 것이 제법 가을인 티를 보인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구름 한 점 없는 깨끗한 파란 화면이 가득. 그 화면에 벌써 빨간 고추 잠자리 한 마리 날아들어 잠시 맴돈다 싶더니 다시 화면 밖으로 휙 사라진다.
선선한 가을 날씨의 오후. 한적했던 동네 공원은 간만의 좋은 날씨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흙장난하는 아이들을 보며 벤치에 앉아 얘기를 나누는 아주머니들, 귀에 뭔가를 꼽은 채 아까부터 몇 바퀴째를 돌고 있는 한 아가씨, 영화에나 나올 법한 멋진 개와 함께 산책하고 있는 아저씨, 사이좋게 어울려 놀고 있는 아이들, 싸우는 아이들, 우는 아이들, 에 또 ..
" 실례합니다만 .. "
낯선 목소리에 돌아보니 왠 낯선 젊은 부부가 서 있다.
" 저 .. 말씀이신가요? "
두 부부는 말없이 조용한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한다. 왠지 낯익은 느낌에 아는 사람인가 싶어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려 하지만 부부 뒤에 드리워진 태양 덕분에 그들의 얼굴이 보이질 않는다.그저 두 검은 실루엣으로만 보일 정도.
" 그런데 .. 저는 무슨 일로 ? "
두 부부는 이번에도 말없이 손을 내미는데 부인 뒤에 숨어 있던 어린 꼬마가 손을 꼭 쥔 채 따라 나온다. 뭔가 겁먹은 표정.
" 이 아이를 .. "
" 네?! "
" 잠시만 맡아주실 수 있으신가 .. 해서 .. "
녹색 티셔츠에 노란 야구모자 눌러 쓴 꼬마 녀석은 불안한 눈빛으로 연신 나와 부모 눈치를 살펴댄다.
" 아니 .. 저기 왜 제가 두 분의 아드님을 .. "
" 말씀드리기 곤란한 사정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보수는 넉넉히 드릴 테니 오늘 하루만 아무쪼록 부탁드릴게요. "
부부는 어느 새 반억지로 꼬마의 손을 끌어다 내 손에 쥐어준다. 얼떨결에 꼬마 손을 받아 잡는데 꼬마 손이 이상하게 차갑다. 흠칫 놀라 꼬마를 내려다 보는데 얼굴이 무서울 정도로 차갑게 굳어 있다. 아까까지 불안해 보이던 눈빛은 온데 간데 없고 그 차가운 눈빛으로 부모를 쳐다본다. 왠지 모를 섬찟한 마음에 거절하려 다시 고개를 드는데 부부는 벌써 사라지고 없다. 방금까지 여기 앞에 서 있었는데 어찌된 일일까. 어리둥절하여 가만히 서 있는데 이번엔 꼬마 녀석이 잡고 있던 내 손을 더욱 꽉 쥔다. 문득 녀석을 내려다 보니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슬픈 표정. 갑자기 이상한 상황에 처해 나도 이렇게 당황스러운데 녀석은 어떨까. 더군다나 눈 앞에서 그렇게 버림받듯 부모와의 이별을 겪은 녀석은.
나는 손을 놓고 녀석 눈높이에 맞춰 쭈그려 앉았다. 녀석의 눈빛은 뭔가 여전히 슬프다.
" .. 부모님이 뭔가 바쁘신 일을 하시나 보네?"
" .......... "
" 오늘 어디 가신다거나 뭐 하신다는 그런 말씀 못 들었니? "
" ......... "
무슨 질문을 던져도 녀석의 반응은 보이질 않는다. 그저 날 꿰뚫어 내 뒤의 먼 어딘가를 바라보는 듯한 그 공허한 눈빛으로 대답을 대신할 뿐이다.
" 이름이 뭐야? "
" ....... 훈 "
" 뭐라구? "
" 김지훈 !! "
소리와 함께 멋지게 난 침대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바닥에 부딪힌 팔꿈치가 너무 아파 감싸쥔 채로 숨도 못 쉬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내게 엄마가 다시 한 번 소리친다.
" 시계 좀 봐, 이 녀석아! 너 개학하자마자 지각할 거야? 이제 고 2라서 2학기 때부턴 학교 가는 시간도 좀 당겨졌다면서 !? "
아, 그래. 오늘이 개학이었지. 뭐 .. 뭐야. 지금 시간이 몇 시 이길래 저 난리시냐. 어디 보자 .. 시간이 .. 뭐 .. 뭐야, 난 또 .. 이제 겨우 여덟 .. 여덟? ...... 아우 진짜 젠장 !!
* * *
" 김지훈~! 너도 늦었냐? "
바지가 팔로 가는지 다리로 가는지도 모르게 정신없이 아침도 거르고 뛰쳐나와 뛰고 있는데 낯익은 목소리가 뒤통수를 때린다. 아니나 다를까. 상호 자식이다.
" 쓸데없는 데서 동지 의식 찾지 마라 "
" 8시 반 맞지? 9시 아니지? "
" 10분 남았다 "
" 아우 그러게, 분명히, 캐비닛이, 2학기부터는, 30분 땡긴다 그랬다고 아무리 말을 해도, 종진이 그 새끼, 도무지 믿을 생각을, 안 하는 거야~"
" 뛰면서 숨도 안 차냐, 새끼 졸라 말 많네 .. "
아슬아슬한 시간. 전력질주의 속도로 한참을 뛰는데도 상호 녀석 입은 쉴 생각을 안 한다. 그냥 대꾸 않는게 상책이다 싶어 들은 척도 않고 오히려 더 속도를 내 학교앞 서점 모퉁이를 막 도는데 뭔가 매우 익숙한 얼굴이 휙 스쳐가는 게 느껴진다.
ㅡ 뭐 .. 뭐지 ?
이상할 정도로 낯익은 느낌에 달리던 걸 멈추고 뒤를 돌아보니 전봇대에 왠 포스터가 하나 붙어 있다.
ㅡ 미아를 .. 찾습니다?
" 뭐해, 임마! 학교 다 와서 .. "
어느 새 쫓아온 상호 녀석이 뭐라고 뭐라고 떠들지만 이미 귀에 들리질 않는다. 몇 마디 더 떠들던 상호는 결국 혼자 다시 학교로 뛰어가 버리고. 난 무언가에 이끌린 듯 포스터를 향해 걷고 있다.
ㅡ 뭐였지 .. 아까 그 순간의 느낌은 ..
분명히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그런 느낌이었어. 그런데 이젠 그 눈빛이 이 포스터에서 느껴지고 있는 걸. 20여 명 안팎의 어린이들 사진을 차례로 살피던 난 어느 순간 우뚝 멈춰 설 수 밖에 없었다.
< 김지훈, 1979년 3월 서울 출생, 1986년 서울역 실종, 말이 없고 내성적임 >
.. 꿈 속의 그 녀석이 무표정한 표정으로 포스터 속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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