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두 너도 상고 갈 거냐? "
진혁이 녀석은 졸업하면 상고로 가서 멋진 은행원이 될 거란다. 대학 간다는 몇몇 잘 사는 집 애들을 빼놓고는 모두 중학교 졸업하면 상고로 가서 은행에 취직하는 걸 꿈꾸던 시절이었다. 보통 상고 들어가서야 시작한다는 주판도 진혁이 녀석은 아버지 가게에서 어깨너머로 틈틈이 보고 익혀 이미 어느 정도 수준엔 이르렀으니 문제될 거 없다며 자신만만해 했다. 주판이라 .. 저번에 진혁이 녀석이 계란이라도 다루듯 조심스레 가방에서 꺼내어 보여 주었을 때 한 번 봤었구나. 도시 아이들은 국민학교 때부터 여기저기 다니면서 주산을 배운다고 어디선가 듣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주판은 우리에게 그 자체로 뭔가 어른스러워 보일 수 있는, 그런 물건이었다. 딱히 계산할 게 없는데도 괜히 한 번 꺼내어 책상 위에 올려두고 타닥타닥 소리내며 무언가 계산하는 시늉을 하면, 그 자체만으로 같은반 까까머리 친구들과는 다른, 괜시리 어른이 된 듯한 그런 묘한 느낌을 주곤 했다.
" 상고? .. 그래, 고등학교 좋제 .. 고등학교 .. "
진혁이 녀석은 졸업하면 상고로 가서 멋진 은행원이 될 거란다. 대학 간다는 몇몇 잘 사는 집 애들을 빼놓고는 모두 중학교 졸업하면 상고로 가서 은행에 취직하는 걸 꿈꾸던 시절이었다. 보통 상고 들어가서야 시작한다는 주판도 진혁이 녀석은 아버지 가게에서 어깨너머로 틈틈이 보고 익혀 이미 어느 정도 수준엔 이르렀으니 문제될 거 없다며 자신만만해 했다. 주판이라 .. 저번에 진혁이 녀석이 계란이라도 다루듯 조심스레 가방에서 꺼내어 보여 주었을 때 한 번 봤었구나. 도시 아이들은 국민학교 때부터 여기저기 다니면서 주산을 배운다고 어디선가 듣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주판은 우리에게 그 자체로 뭔가 어른스러워 보일 수 있는, 그런 물건이었다. 딱히 계산할 게 없는데도 괜히 한 번 꺼내어 책상 위에 올려두고 타닥타닥 소리내며 무언가 계산하는 시늉을 하면, 그 자체만으로 같은반 까까머리 친구들과는 다른, 괜시리 어른이 된 듯한 그런 묘한 느낌을 주곤 했다.
" 상고? .. 그래, 고등학교 좋제 .. 고등학교 .. "
more..
서로를 발전시키는 가장 이상적인 관계가 바로 라이벌이라고 했던가. 보통 성적이 엇비슷하다면 서로간에 묘한 신경전이 있다던데 우리에게만은 전혀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한 학년에 반이 하나씩만 있던 작은 시골 학교에서 우리는 그렇게 중학교 3년을 내 엎치락 뒤치락 1, 2등을 다투었지만 한 번도 서로 마음이 안 맞아 다투었다거나 주먹다짐을 해 본 일이 없었다. 같은 반 다른 친구들도 다들 착하고 좋았지만, 진혁이 녀석과는 특히나 더 생각이 통했다. 다른 녀석들이 가끔 내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고 유난 떤다며 핀잔을 줄 때에도 그 녀석만은 그건 이러이러한 거다, 라며 반론을 펼 줄 알았다. 솔직히 지금 생각하면 어찌되든 상관없는 그런 시시한 이야기들이지만 그래도 그 땐 나름대로 머리 좀 컸다고 그렇게 꽤나 진지한 얼굴을 하고 여러가지 주제를 놓고 토론하는 게 마냥 좋았다. 뭔가 멋져 보이기도 했고. 읍내에서 쌀가게를 하는 진혁이네는 마을에서도 꽤나 알아주는 잘 사는 집에 속했다. 그런 진혁이가 보통 그 때 다른 집들과 별반 다를 바 없이 농사로 근근이 살아가던 우리집에 놀러오기도 하고 나랑 어울려 다니는 걸 주변에서 참 신기하게 봤었던 기억이 있다. 나 역시 그런 우리집을 진혁이에게 보여주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고. 우리는 친구였다.
그 해 여름엔 유난히 비가 많이 왔다. 다행히 집이 마을에서 지대가 꽤 높은 편에 속했기 때문에 불어난 강물 피해 같은 건 없었지만 학교도 빠져가며 초여름 부모님 도와 모까지 직접 잡았던 벼농사를 완전히 망쳐 버렸다. 어느 집이나 별반 차이가 없던 시절이지만, 한 해 농사 지어 다음 해 겨우 먹고 살던 판국에 완전히 망쳐버린 한 해 농사는 너무 가혹했다. 모두가 잠든 밤중에 혼자 마루로 나가 마당에 내려가신 아버지가 담배연기 핑계로 내쉬는 한숨 소리는 잠든 척 눈감고 있던 내 속까지 꺼트릴 정도로 허망했다. 그건, 매번 자기가 싸온 도시락 절반을 내게 덜어주며 자기는 양이 적어 많이 못 먹는다는 어설픈 핑계를 대곤 하는 진혁이 녀석의 뻔한 거짓말에, 짐짓 모르는 척 내가 너 도와주는 거라며 너스레를 떨며 속아넘어가주는 그런 우리들의 암묵적인 합의 만큼이나 아릿한 것이었다.
8남매나 되는 대식구에 셋째라는 위치는 참 애매했다. 형 두 명은 공부를 곧잘 해서 두 명 다 중학교 때부터 인근 도시로 나가 자취하며 도시에서 제일 들어가기 어렵다는 고등학교에 입학해 다니고 있었고, 나는 집에서 다섯 명이나 되는 동생들을 챙기면서 농사일도 도와가며 실질적인 장남 역할을 하고 있었다. 형들은 도시로 나가기 전엔 그래도 부모님 걱정도 많이 하고 동생들도 잘 챙기는 모습을 보이더니 도시로 나가서 학교 다니고 나서부턴 가끔씩 집에 올 때마다 뭐가 그리 아쉬운지 아쉬운 소리만 잔뜩 늘어놓기 시작했다. 특히 고등학교 들어가고 나서부턴 그 정도가 더욱 심해졌는데, 아니 무슨 사야 할 책은 매번 뭐가 그리 많고 또 못 신게 된 것도 아니고 구두가 좀 해진 게 공부하는데 뭐가 어떻느냔 말이다. 내가 고등학교에 아직 가 보질 않아서 모르는 걸지도 모르지만 어딘지 모르게 어린애들 같아져 버린 형들 모습에 조금 섭섭하기도 했다. 하고 싶은 거 필요한 거 다 챙기고 살만큼 정말 우리집이 저렇게 넉넉한 줄 아는 건가. 형들은 여름에 비 때문에 농사 망쳐서 요새 아버지 매일밤 한숨 쉬시는 건 알고나 있느냐며 따지고 들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간신히 억누르곤 했다. 괜히 서운한 마음에 형들 내려왔던 어느 날도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다 뜻하지 않게 들어버렸던 거다, 조용히 부모님 두 분 걱정스레 나누시던 그 날 대화도.
- .. 필원이가 그래도 큰 앤데 대학은 보내야 하지 않겠어라.
대학? 아, 그러고 보니 큰 형이 벌써 고 3이구나. 어째 집에 오랜만에 내려온 거 같더니 벌써 그런 얘기가 나오나 보다. 큰 형 대학 가면 형이 입던 교복 같은 거 나 달라고 해야겠다. 나도 하면 그 정도 학교는 갈 수 있다구. 어차피 둘째 형이야 이미 자기가 입던거 있을 거 아냐. 교복이라 .. 그 모자도 참 멋있어 보이든데. 나한테도 맞을래나?
- 그걸 누가 모르나, 이 사람아. 대학은 뭐 무료로 간당가. 내년에 필두도 고등학교 가는 거 몰러?
앗. 내 이야기다. 나도 그래도 공부는 좀 한다고 해서 형들 간 학교 정도는 들어갈 수 있을 거 같은데. 다만 나까지 그렇게 도시로 나가서 공부한다고 나가면 나이 터울이 좀 크게 나는 바로 아랫동생 녀석이 장남 역할을 잘 해낼까가 걱정이다. 음 .. 그래도 나도 도시 고등학교 가서 더 많은 거 공부도 하고 보고 배우고도 싶은 걸. 나는 뭐 형들 고등학교 간다고 도시 나갔을 때 뭐 알았나. 부딪히고 하다 보면 다 잘 하게 되는 걸 거다. 형들 다니는 고등학교 바로 옆에는 여자애들만 다니는 고등학교도 있다고 그러던데. 도시 애들은 피부도 새하얗고 날씬한 애들이 많다고, 둘째 형이 그랬다. 하지만 애인이라면서 보여주던 사진 속 여자애는 솔직히 좀 아파 보였다. 사실 애인도 뭐도 아니다. 편지 몇 통 왔다갔다 한 게 무슨 애인이야. 그런데 형은 그게 예쁘다고 그랬다. 어디 아픈 거 아니여? 라고 했다가 한 대 맞았던 기억이 문득 떠올라 괜히 한 번 머리를 쓰다듬어 본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그 여자애는 어디 아픈 게 확실하다. 딱 보면 안다. 그런 여자애는 힘이 없어서 나중에 애기도 못 낳을 거다.
- 그거야 그래도 .. 그래도 일단 큰 애를 잘 갈쳐노믄은 나중에 지가 잘 되아갖고 동생들도 잘 거두겄소 안. 필원이 대학교 들어간다고 혀도 필호도 아직 고등학교 안 끝났는디 .. 거기서 필두까지 고등학교 들어간다가믄 어치케 한다요.
- 말도 안 된 소리 하덜 말어. 자네 내가 우리 성님 갈친다고 나만 학교 제대로 못 가가꼬 이렇게 사는 거 봄서도 그런 말이 나온가. 고등학교까지 갈차노믄 인자 즈그들이 알아서 해야제 뭔 대학까지 보내준당가. 요새 고등학교까지만 나와도 다들 알아서 잘들 해아꼬 잘만 살드만.
- 아니 그래도 .. 집안에 대학 간 사람 한 명은 있어야 하지 않겄어라 .. 필두는 원체 애가 좀 똑똑해아꼬 빠리빠리항께 공부 좀 늦게 시작혀도 금방 따라잡아불 것이요.
- 그래도 그런 게 아닌 것이여. 필두가 더 잘해아꼬 더 좋은 대학 가불지 누가 안당가? 애들 들을까 겁나네. 애들 잔디 들을까 겁낭께 행여나 애들 앞에서 그런 말 하덜 마소잉.
... 멍했다. 큰형이 대학을 가게 되면 내가 고등학교를 가기가 힘들어 진다는 것. 전혀 생각도 못했던 사실인데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구나 - 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한밤중에 혼자 마당에 내려가 담배 태우시며 한숨을 쉬시는 아버지 보며 나름 철 들었다고 집안 걱정에 함께 잠 못 들던 난데. 나름 제법 머리 커졌다고 철 든 척 해 보지만 그래도 자꾸 차오르는 서운한 마음은 지울 수가 없다. 나도 중학교 들어가면 도시 나가서 형들 다녔던 학교 다닐 줄 알았는데. 작년엔가 중학교는 이제 시험 안 치고 들어가게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나 때까지는 시험쳐서 들어가던 때였다. 그 중학교 입시 시험도 잘 칠 자신 있었는데. 나까지 도시 가 버리면 넷째 필상이는 아직 너무 어리고 집안 일 도울 사람도 없다고 해서 그래 중학교 정도까지야 집에서 다녀도 별 차이 없겠지 별 서운한 기색 없이 쭉 여기서 다닌 거잖아. 당연히 고등학교는 나도 도시로 나가 형들이랑 같이 공부도 하고 할 줄 알았는데 이제 뭐라. 큰 형 대학교 가야 되니까 난 고등학교 가지 말라고?
차오르다 못한 서운함이 서러움으로 변하며 점점 넘치기 시작한다. 왜 형들한테는 그렇게 잘 해 주시면서 나한테 이러시는 거지. 어무이 말이 더 서럽다. 솔직히 집 일 같은 거 내가 다 하잖아. 형들은 공부하느라 힘들다고 맨날 내가 일 같은 것도 다 했잖아. 학교도 그렇다. 먼저 태어났으니 큰 형이 먼저 대학 가는 거지 내가 공부를 더 못 해서 대학 지금 못 가는 것도 아니잖아. 형은 고등학교도 다녔으면서 왜 굳이 대학까지 가려고 하는 거야. 집 사정을 알기는 하고 하는 소린가. 고등학교 졸업해도 요새 다 취직 잘 하더만 아부지 말대로 정 가고 싶으면 형이 고등학교 졸업하고 회사 다니면서 돈벌어서 그 돈으로 대학교 가든가. 자기 대학교 때문에 동생 중학교만 졸업시키면 기분이 좋나? 옛날엔 많았다고 해도 요새 누가 중학교만 졸업하고 돈 벌러 다녀. 나도 공부 계속 하고 싶다. 나도 도시 나가서 애인도 만들고 편지도 쓰고 놀러도 다니고 그러고 싶다. 그래서 도시 애들하고 붙어서도 1등 계속 해서 멋진 대학 나도 가고 싶다. 왜 내가 고등학교를 못 가. 큰 형 대학교 가는 거 때문에 왜 내가 그래야 돼. 싫어. 안 해. 아부지 말이 다 맞다. 난 고등학교까지만 보내주면 그 뒤로는 내가 다 알아서 할 거다. 음 .. 난 구두 해지고 뭐 그래도 집에 내려와서 새 구두 사 달라는 그런 말 안 할 거다. 책도 뭐 정 필요하면 그냥 친구들 꺼 하루이틀 잠깐 빌려서 다 봐 버리지 뭐. 나도 고등학교 가고 싶다. 나도 더 큰 데서 공부하고 싶다.
" .. 내 말 듣고 있냐? "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눈 앞에서 진혁이 녀석이 고깝게 쳐다 보고 있다. 음? 아, 상고 갈 거냐고 물어 봤었지 .. 상고든 뭐든 좋으니 난 고등학교를 가고 싶단다, 이 놈아. 넌 평생 이해못하겠지만 이런 기분.
" 뭐 .. 모르것다 ~ 어떻게든 되것제 뭐. "
" 그게 뭔 소리여, 어제 담임이 집에 가서 적어서 오늘까지 가꼬오라 했었자네. 안 가꼬 왔냐. "
" 그러게 .. 깜빡해부런는갑다. 나중에 갖다내제, 뭐 .. 나중에 .. "
어제도 여느 때처럼 어무이는 땔감 부러뜨려 가며 부엌에서 저녁을 짓느라 정신이 없으셨고 아부지는 옆집 석현이 아부지랑 어디 잠깐 나가셨다고 했다. 주머니에 들어있던, 담임이 나눠준 고등학교 희망서 종이를 몇 번쯤 꾸깃 쥐어본다. 연신 오매 눈 매운거 연발하며 불쏘시개로 아궁이를 들쑤시던 어무이를 부엌 밖에 서서 그렇게 잠깐 바라보다 툭 던졌다.
- .. 저 고등학교 안갈랍니다.
40년이 다 지나가는 지금도 그 순간 어머니 표정을 난 잊을 수가 없다. 이게 뜬금없이 무슨 소리인가 싶은 의아한 표정이 잠시, 이제 큰 아이 대학 보내는 거 좀 편하게 얘기할 수 있겠다 싶은 안도감이 잠시, 하지만 이걸 내색하면 서운해 하겠구나 싶은 생각에 다시 애써 가리려는 표정이 잠시. 마치 몇 년처럼 느껴지던 어색한 수 초간의 침묵을 깨어준건 슬슬 되어가는 밥 냄새를 맡았는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난리를 치는 마당 대문 옆 누렁이 녀석이었다.
- 갑자기 먼 소리다냐 그게?
- 고등학교 안 갈란다고요.
애써 별 일 아닌 듯 머리 긁적여 보지만 마구 치밀어 오르는 괜한 심통은 어쩔 수가 없다. 큰 형만 자식인가? 이내 가려지긴 했지만 어무이 표정에 얼핏 스쳐간 그 아리송한 안도의 눈빛이 난 너무 서럽다. 이 얘기 들으면 아부지는 뭐라고 하실까나.
- 언제는 도시 나가서 도시 아그덜이랑 공부해 보고 싶다드만 고새 맘이 바껴븐냐.
- 아 그거 .. 음 근데 어차피 난 공부하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고 .. 그냥 이렇게 살라요.
- 그래도 니 성적표 같은 거 보면 꼬박꼬박 잘 했음서 .. 그라도 괜찮겄냐?
- 일단 돈부터 벌라요. 그래서 나중에 머리도 좀 차고 나면 그 때 가서 학교 다니믄 되제.
미리 밝혀두지만 이건 절대로 큰 형을 생각해서나 뭐 그런 게 아니었다. 대학 가고 싶어하는 그 마음은 짐작은 간다. 아직 닥쳐보지 않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나라도 그런 상황이 되면 가고 싶어질 거 같기는 하니까. 다만 나 같으면 동생들이 그렇게 많은데 고집까지는 하지 않았겠지. 큰 형 생각하는게 좀 서운하긴 하지만 .. 그런 걸로 밤에 잠 못 드시는 아버지 한숨소리가 이제 듣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 이게 어디 사람 탓이겠나, 상황이 나쁜 거겠지. 뭐 당장은 공부 못 하더라도 내가 돈 벌어서 난 내가 대학 갈 거다. 내 돈으로 내가 고등학교도 가고 대학교도 가고 해서 돈도 많이 벌어서 그렇게 성공하고 말 거다. 애써 생각은 그렇게 해 보지만 이상하게 자꾸 차오르는 야속함은 어쩔 수가 없다. 이 야속함이 한 마디 빈말이라도 말려보지 않는 어무이에게서 오는 건지, 이렇게 만드는 이런저런 상황에서 오는 건지, 동생들은 나몰라라 대학을 은근히 고집하는 큰 형한테서 오는 건지, 아직은 알 수가 없다.
- 나 잠깐 나갔다 오요.
- 저녁 다 해간디 가긴 어딜 갈라고?
- 잠깐 바람 좀 쐬고 올라고 .. 금방 올께라.
- 금방 와야 된다이~이따 아부지도 오실껑게.
더 있다간 괜히 심통을 부릴 것만 같아서 일단 집 밖으로 나오긴 했지만 막상 어디를 갈 지 모르는 발걸음은 멈칫거리기만 한다. 참, 고추밭 옆에 커다란 돌 같은 게 있었지. 어릴 적부터 아부지한테 혼나거나 하면 항상 거기 가서 위로 올라가 누워 있곤 했다. 내가 잘못한 일이라도, 그 곳에 가면 일단 내 편을 들어 주고 나를 위로해주는 기분이 들어 좋았다. 나중엔 단순한 고민이 생겨도, 더 나중엔 그냥 습관적으로 가서 누워 있곤 했다. 누워 있으면 눈앞 시야엔 파란 하늘만 가득하다. 간간이 떠 가는 하얀 구름들이 시간이 멈춘 게 아니라는 걸 일깨워준다. 언젠가 나 누워 있는 걸 옆집 석현이 녀석이 보고는 가끔 자기도 올라가 누워 있는 거 같더라. 우리는 그 돌을 하늘 보는 데라고 불렀다. 물론 하늘이야 어디서 보든 똑같은 색깔을 우리에게 내려 보이겠지만 그 곳에 누워서 바라보는 하늘은 정말 마음을 달래주는 그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무슨 짓을 했든, 무슨 고민을 갖고 왔든 다 이해하고 다 괜찮다는 듯이 품어주는 그 넓은 하늘이, 난 좋았다.
오늘도 하늘은 여전하다. 뉘엿뉘엿 슬슬 저물어 보려고 태양도 눈치 보는 저녁. 낮 때처럼 얼굴 간지러운 햇살은 주지 못하지만 이렇게 눈 감고 누워 있으면 그래도 모든 고민이 다 부질없는 일만 같다. 간간히 부는 시원한 바람도 좋고 .. 뭐가 급한지 벌써 나타나 저쪽 하늘에 떠 있는 반달도 그냥 좋고. 돌이 은근 높이도 있고 가운데 부분이 조금 움푹하게 패어 있어 이렇게 위에 하늘보고 누워 있으면 지나다니는 사람이 볼 때 잘 보이지가 않았다. 덕분에 이 위에 올라오고 나면 다른 사람에게 간섭을 받거나 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러다 살짝 선잠이 들었을 때 가끔 석현이 녀석이 와서 깨우거나 한 적은 있었지만. 문득 가슴이 부풀어 터질 때까지 숨을 들이 마셨다가 천천히 내뱉어 본다. 이게 좋다. 이 느낌. 여기 와서 누워 있으면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아도 이렇게 그냥 마음이 차분히 정리가 되는 듯한 이 느낌이 좋다. 우리 집인지, 다른 집인지 바람타고 슬금슬금 마을 떠다니는 고슬고슬 밥 짓는 내음이 전해져 온다. 그러고 보니 오늘 점심도 못 먹었구나. 갑자기 몰려오는 허기에 집에 가서 밥이나 먹자 생각에 읏차 몸을 일으키는데 옆에 갑자기 큰 형이 서 있다.
- 워매 놀래라 .. 언제부터 거기 있었당가?
- 최필두.
- 왔으믄 왔다고 말을 하제 .. 깜짝 놀래부렀소.
- 야, 최필두 !!!
놀래라. 돌에서 뛰어내리려다 고개를 드니 큰 형은 뭔가 화가 잔뜩 나 있는 표정이다. 음? 뭐 때문에 저러는 걸까. 아 .. 혹시 어제 형이 벗어놓은 교복 잠깐 한 번 입어봤던 게 들킨 건가? 그럴 리가 없는데 .. 조심스럽게 한 번 걸쳐만 보고 다시 원래 걸려 있던 그대로 걸어 놨는데 .. 아. 모자. 모자를 그냥 내가 책상에 올려 놨었던가? 아니 걸어놨던 거 같은데 .. 기억이 뿌옇다. 혹시 그거 보고 안 건가? 아이고 .. 골치 아프게 됐네. 어떻게 얘기해야 할래나.
- 아, 그거 내가 손댈라고 한 게 아니고 ..
- 너 고등학교 안 간다 그랬다매.
엇. .. 아, 집에 들렀다 왔구나. 어무이가 얘기하셨나 보네. 교복 얘기가 아닌가 보다. 그래도 큰 형이라고 형한테 바로 얘기하셨구나 .. 뭐 .. 내가 나중에 돈 벌어서 가면 되지 .. 그러니 그렇게 미안해 하지 마소 .. 난 얼굴이 굳어 있어서 화난 건 줄 알았잖아. 난 또 뭐라고 .. 갑작스런 큰 형의 등장에 잠시 잊고 있었던 허기가 다시 돌아온다.
- 아~그거, 뭐 내가 나중에 돈 ..
- 그렇게 공부가 하기 싫냐?
왈칵. 참 이상한 일이다. 내심 이제 진정됐다고 생각했고, 또 그래 나중에 내가 벌어서 가지 뭐 마음도 다 다독였다고 생각했는데 저 한 마디. 저 한 마디에 왈칵 솟아버린 눈물은 순식간에 내 눈을 가득 메운다. 뭐라고 대꾸하고 싶은데 .. 자꾸 가슴이 먹먹하게 막혀와서 말이 안 나온다. 공부가 하기 싫냐고? 그렇게 공부가 하기 싫냐고?
- 너는 저렇게 고생하시는 부모님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냐? 뭐? 학교 그만두고 돈을 벌어? 어무이한테 그게 할 소리야?
그래도 어릴 적엔 잘 놀아주고 의젓했던 큰 형이라 서운하긴 했어도 밉거나 그런 적은 지금껏 한 번도 없었는데. 지금은 눈 앞에 있는 큰 형이 너무 밉다. 그냥 밉다. 그만. 멈춰. 가득 메우다 못한 눈물이 결국 주륵 뺨을 타고 흐른다.
- 싫으면 가지 마, 이 자식아. 네가 가기 싫다고 한 거니까 나중에 딴 소리나 하지 말고. 다 큰 줄 알았더니 아직도 철이 덜 들어가지고 .. 들어와서 밥이나 먹던지 말던지.
자기 할 말만 하고 홱 돌아서 집으로 향하는 큰 형 뒷모습이 무섭도록 남 같다. 아니, 정작 무서운 건 그렇게 공부가 하기 싫냐는 그 한 마디. 마음 정리 마치고 기분 좋게 저녁먹으러 가려던 나였는데 .. 그 한 마디가 이렇게 가슴이 에이고 찢어진다. 말 한 마디가 이렇게 서럽고 아프다. 먹먹하던 가슴은 점차 들썩이며 서운함을, 울분을 밖으로 토해내기 시작한다. 울고 싶지 않은데, 약해지고 싶지 않은데 한 번 발동이 걸린 들썩임은 쉬이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아니, 멈추기는 커녕 점점 격해지며 숨쉬기조차 곤란하게 만든다. 그나마 소리를 겉으로 내지 않으려 이를 악물고 끅끅대며 참는 건 마지막 남은 내 자존심이다.
돌 위에 앉아 울고 있다니. 남자 나이 열 여섯에 동네 우세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혹시 아는 동네 어른이 지나가다 보기라도 할까 눈물 쓱 훔치고 다시 돌 위에 하늘 바라보고 누워 보지만 이내 눈물이 가득 차오른다. 그래, 큰 형이 참 생각이 짧네. 나이 어린 네가 생각하는 게 더 낫구나. 울지 마라. 나중에 네가 더 잘 되어서 부모님께도 더 잘 하고 하면 되지. 서러운데 다독여 주면 더 왈칵하는 게 사람인지라. 평소보다 더 많은 구름 띄워보내며 날 위로해주는 하늘은 오늘따라 더 듬직하게 내 편을 들어준다. 하지만 자꾸만 구름과 뒤섞여 눈 앞 뿌얘지는 잿빛 하늘은 어두워지는 하늘 탓인 건지, 아직 어린 내 나이 탓인 건지.
1969년 가을,
하늘이 유난히 맑던 그 시절.
나는 이제 열 여섯이었다.
그 해 여름엔 유난히 비가 많이 왔다. 다행히 집이 마을에서 지대가 꽤 높은 편에 속했기 때문에 불어난 강물 피해 같은 건 없었지만 학교도 빠져가며 초여름 부모님 도와 모까지 직접 잡았던 벼농사를 완전히 망쳐 버렸다. 어느 집이나 별반 차이가 없던 시절이지만, 한 해 농사 지어 다음 해 겨우 먹고 살던 판국에 완전히 망쳐버린 한 해 농사는 너무 가혹했다. 모두가 잠든 밤중에 혼자 마루로 나가 마당에 내려가신 아버지가 담배연기 핑계로 내쉬는 한숨 소리는 잠든 척 눈감고 있던 내 속까지 꺼트릴 정도로 허망했다. 그건, 매번 자기가 싸온 도시락 절반을 내게 덜어주며 자기는 양이 적어 많이 못 먹는다는 어설픈 핑계를 대곤 하는 진혁이 녀석의 뻔한 거짓말에, 짐짓 모르는 척 내가 너 도와주는 거라며 너스레를 떨며 속아넘어가주는 그런 우리들의 암묵적인 합의 만큼이나 아릿한 것이었다.
8남매나 되는 대식구에 셋째라는 위치는 참 애매했다. 형 두 명은 공부를 곧잘 해서 두 명 다 중학교 때부터 인근 도시로 나가 자취하며 도시에서 제일 들어가기 어렵다는 고등학교에 입학해 다니고 있었고, 나는 집에서 다섯 명이나 되는 동생들을 챙기면서 농사일도 도와가며 실질적인 장남 역할을 하고 있었다. 형들은 도시로 나가기 전엔 그래도 부모님 걱정도 많이 하고 동생들도 잘 챙기는 모습을 보이더니 도시로 나가서 학교 다니고 나서부턴 가끔씩 집에 올 때마다 뭐가 그리 아쉬운지 아쉬운 소리만 잔뜩 늘어놓기 시작했다. 특히 고등학교 들어가고 나서부턴 그 정도가 더욱 심해졌는데, 아니 무슨 사야 할 책은 매번 뭐가 그리 많고 또 못 신게 된 것도 아니고 구두가 좀 해진 게 공부하는데 뭐가 어떻느냔 말이다. 내가 고등학교에 아직 가 보질 않아서 모르는 걸지도 모르지만 어딘지 모르게 어린애들 같아져 버린 형들 모습에 조금 섭섭하기도 했다. 하고 싶은 거 필요한 거 다 챙기고 살만큼 정말 우리집이 저렇게 넉넉한 줄 아는 건가. 형들은 여름에 비 때문에 농사 망쳐서 요새 아버지 매일밤 한숨 쉬시는 건 알고나 있느냐며 따지고 들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간신히 억누르곤 했다. 괜히 서운한 마음에 형들 내려왔던 어느 날도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다 뜻하지 않게 들어버렸던 거다, 조용히 부모님 두 분 걱정스레 나누시던 그 날 대화도.
- .. 필원이가 그래도 큰 앤데 대학은 보내야 하지 않겠어라.
대학? 아, 그러고 보니 큰 형이 벌써 고 3이구나. 어째 집에 오랜만에 내려온 거 같더니 벌써 그런 얘기가 나오나 보다. 큰 형 대학 가면 형이 입던 교복 같은 거 나 달라고 해야겠다. 나도 하면 그 정도 학교는 갈 수 있다구. 어차피 둘째 형이야 이미 자기가 입던거 있을 거 아냐. 교복이라 .. 그 모자도 참 멋있어 보이든데. 나한테도 맞을래나?
- 그걸 누가 모르나, 이 사람아. 대학은 뭐 무료로 간당가. 내년에 필두도 고등학교 가는 거 몰러?
앗. 내 이야기다. 나도 그래도 공부는 좀 한다고 해서 형들 간 학교 정도는 들어갈 수 있을 거 같은데. 다만 나까지 그렇게 도시로 나가서 공부한다고 나가면 나이 터울이 좀 크게 나는 바로 아랫동생 녀석이 장남 역할을 잘 해낼까가 걱정이다. 음 .. 그래도 나도 도시 고등학교 가서 더 많은 거 공부도 하고 보고 배우고도 싶은 걸. 나는 뭐 형들 고등학교 간다고 도시 나갔을 때 뭐 알았나. 부딪히고 하다 보면 다 잘 하게 되는 걸 거다. 형들 다니는 고등학교 바로 옆에는 여자애들만 다니는 고등학교도 있다고 그러던데. 도시 애들은 피부도 새하얗고 날씬한 애들이 많다고, 둘째 형이 그랬다. 하지만 애인이라면서 보여주던 사진 속 여자애는 솔직히 좀 아파 보였다. 사실 애인도 뭐도 아니다. 편지 몇 통 왔다갔다 한 게 무슨 애인이야. 그런데 형은 그게 예쁘다고 그랬다. 어디 아픈 거 아니여? 라고 했다가 한 대 맞았던 기억이 문득 떠올라 괜히 한 번 머리를 쓰다듬어 본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그 여자애는 어디 아픈 게 확실하다. 딱 보면 안다. 그런 여자애는 힘이 없어서 나중에 애기도 못 낳을 거다.
- 그거야 그래도 .. 그래도 일단 큰 애를 잘 갈쳐노믄은 나중에 지가 잘 되아갖고 동생들도 잘 거두겄소 안. 필원이 대학교 들어간다고 혀도 필호도 아직 고등학교 안 끝났는디 .. 거기서 필두까지 고등학교 들어간다가믄 어치케 한다요.
- 말도 안 된 소리 하덜 말어. 자네 내가 우리 성님 갈친다고 나만 학교 제대로 못 가가꼬 이렇게 사는 거 봄서도 그런 말이 나온가. 고등학교까지 갈차노믄 인자 즈그들이 알아서 해야제 뭔 대학까지 보내준당가. 요새 고등학교까지만 나와도 다들 알아서 잘들 해아꼬 잘만 살드만.
- 아니 그래도 .. 집안에 대학 간 사람 한 명은 있어야 하지 않겄어라 .. 필두는 원체 애가 좀 똑똑해아꼬 빠리빠리항께 공부 좀 늦게 시작혀도 금방 따라잡아불 것이요.
- 그래도 그런 게 아닌 것이여. 필두가 더 잘해아꼬 더 좋은 대학 가불지 누가 안당가? 애들 들을까 겁나네. 애들 잔디 들을까 겁낭께 행여나 애들 앞에서 그런 말 하덜 마소잉.
... 멍했다. 큰형이 대학을 가게 되면 내가 고등학교를 가기가 힘들어 진다는 것. 전혀 생각도 못했던 사실인데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구나 - 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한밤중에 혼자 마당에 내려가 담배 태우시며 한숨을 쉬시는 아버지 보며 나름 철 들었다고 집안 걱정에 함께 잠 못 들던 난데. 나름 제법 머리 커졌다고 철 든 척 해 보지만 그래도 자꾸 차오르는 서운한 마음은 지울 수가 없다. 나도 중학교 들어가면 도시 나가서 형들 다녔던 학교 다닐 줄 알았는데. 작년엔가 중학교는 이제 시험 안 치고 들어가게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나 때까지는 시험쳐서 들어가던 때였다. 그 중학교 입시 시험도 잘 칠 자신 있었는데. 나까지 도시 가 버리면 넷째 필상이는 아직 너무 어리고 집안 일 도울 사람도 없다고 해서 그래 중학교 정도까지야 집에서 다녀도 별 차이 없겠지 별 서운한 기색 없이 쭉 여기서 다닌 거잖아. 당연히 고등학교는 나도 도시로 나가 형들이랑 같이 공부도 하고 할 줄 알았는데 이제 뭐라. 큰 형 대학교 가야 되니까 난 고등학교 가지 말라고?
차오르다 못한 서운함이 서러움으로 변하며 점점 넘치기 시작한다. 왜 형들한테는 그렇게 잘 해 주시면서 나한테 이러시는 거지. 어무이 말이 더 서럽다. 솔직히 집 일 같은 거 내가 다 하잖아. 형들은 공부하느라 힘들다고 맨날 내가 일 같은 것도 다 했잖아. 학교도 그렇다. 먼저 태어났으니 큰 형이 먼저 대학 가는 거지 내가 공부를 더 못 해서 대학 지금 못 가는 것도 아니잖아. 형은 고등학교도 다녔으면서 왜 굳이 대학까지 가려고 하는 거야. 집 사정을 알기는 하고 하는 소린가. 고등학교 졸업해도 요새 다 취직 잘 하더만 아부지 말대로 정 가고 싶으면 형이 고등학교 졸업하고 회사 다니면서 돈벌어서 그 돈으로 대학교 가든가. 자기 대학교 때문에 동생 중학교만 졸업시키면 기분이 좋나? 옛날엔 많았다고 해도 요새 누가 중학교만 졸업하고 돈 벌러 다녀. 나도 공부 계속 하고 싶다. 나도 도시 나가서 애인도 만들고 편지도 쓰고 놀러도 다니고 그러고 싶다. 그래서 도시 애들하고 붙어서도 1등 계속 해서 멋진 대학 나도 가고 싶다. 왜 내가 고등학교를 못 가. 큰 형 대학교 가는 거 때문에 왜 내가 그래야 돼. 싫어. 안 해. 아부지 말이 다 맞다. 난 고등학교까지만 보내주면 그 뒤로는 내가 다 알아서 할 거다. 음 .. 난 구두 해지고 뭐 그래도 집에 내려와서 새 구두 사 달라는 그런 말 안 할 거다. 책도 뭐 정 필요하면 그냥 친구들 꺼 하루이틀 잠깐 빌려서 다 봐 버리지 뭐. 나도 고등학교 가고 싶다. 나도 더 큰 데서 공부하고 싶다.
" .. 내 말 듣고 있냐? "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눈 앞에서 진혁이 녀석이 고깝게 쳐다 보고 있다. 음? 아, 상고 갈 거냐고 물어 봤었지 .. 상고든 뭐든 좋으니 난 고등학교를 가고 싶단다, 이 놈아. 넌 평생 이해못하겠지만 이런 기분.
" 뭐 .. 모르것다 ~ 어떻게든 되것제 뭐. "
" 그게 뭔 소리여, 어제 담임이 집에 가서 적어서 오늘까지 가꼬오라 했었자네. 안 가꼬 왔냐. "
" 그러게 .. 깜빡해부런는갑다. 나중에 갖다내제, 뭐 .. 나중에 .. "
어제도 여느 때처럼 어무이는 땔감 부러뜨려 가며 부엌에서 저녁을 짓느라 정신이 없으셨고 아부지는 옆집 석현이 아부지랑 어디 잠깐 나가셨다고 했다. 주머니에 들어있던, 담임이 나눠준 고등학교 희망서 종이를 몇 번쯤 꾸깃 쥐어본다. 연신 오매 눈 매운거 연발하며 불쏘시개로 아궁이를 들쑤시던 어무이를 부엌 밖에 서서 그렇게 잠깐 바라보다 툭 던졌다.
- .. 저 고등학교 안갈랍니다.
40년이 다 지나가는 지금도 그 순간 어머니 표정을 난 잊을 수가 없다. 이게 뜬금없이 무슨 소리인가 싶은 의아한 표정이 잠시, 이제 큰 아이 대학 보내는 거 좀 편하게 얘기할 수 있겠다 싶은 안도감이 잠시, 하지만 이걸 내색하면 서운해 하겠구나 싶은 생각에 다시 애써 가리려는 표정이 잠시. 마치 몇 년처럼 느껴지던 어색한 수 초간의 침묵을 깨어준건 슬슬 되어가는 밥 냄새를 맡았는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난리를 치는 마당 대문 옆 누렁이 녀석이었다.
- 갑자기 먼 소리다냐 그게?
- 고등학교 안 갈란다고요.
애써 별 일 아닌 듯 머리 긁적여 보지만 마구 치밀어 오르는 괜한 심통은 어쩔 수가 없다. 큰 형만 자식인가? 이내 가려지긴 했지만 어무이 표정에 얼핏 스쳐간 그 아리송한 안도의 눈빛이 난 너무 서럽다. 이 얘기 들으면 아부지는 뭐라고 하실까나.
- 언제는 도시 나가서 도시 아그덜이랑 공부해 보고 싶다드만 고새 맘이 바껴븐냐.
- 아 그거 .. 음 근데 어차피 난 공부하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고 .. 그냥 이렇게 살라요.
- 그래도 니 성적표 같은 거 보면 꼬박꼬박 잘 했음서 .. 그라도 괜찮겄냐?
- 일단 돈부터 벌라요. 그래서 나중에 머리도 좀 차고 나면 그 때 가서 학교 다니믄 되제.
미리 밝혀두지만 이건 절대로 큰 형을 생각해서나 뭐 그런 게 아니었다. 대학 가고 싶어하는 그 마음은 짐작은 간다. 아직 닥쳐보지 않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나라도 그런 상황이 되면 가고 싶어질 거 같기는 하니까. 다만 나 같으면 동생들이 그렇게 많은데 고집까지는 하지 않았겠지. 큰 형 생각하는게 좀 서운하긴 하지만 .. 그런 걸로 밤에 잠 못 드시는 아버지 한숨소리가 이제 듣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 이게 어디 사람 탓이겠나, 상황이 나쁜 거겠지. 뭐 당장은 공부 못 하더라도 내가 돈 벌어서 난 내가 대학 갈 거다. 내 돈으로 내가 고등학교도 가고 대학교도 가고 해서 돈도 많이 벌어서 그렇게 성공하고 말 거다. 애써 생각은 그렇게 해 보지만 이상하게 자꾸 차오르는 야속함은 어쩔 수가 없다. 이 야속함이 한 마디 빈말이라도 말려보지 않는 어무이에게서 오는 건지, 이렇게 만드는 이런저런 상황에서 오는 건지, 동생들은 나몰라라 대학을 은근히 고집하는 큰 형한테서 오는 건지, 아직은 알 수가 없다.
- 나 잠깐 나갔다 오요.
- 저녁 다 해간디 가긴 어딜 갈라고?
- 잠깐 바람 좀 쐬고 올라고 .. 금방 올께라.
- 금방 와야 된다이~이따 아부지도 오실껑게.
더 있다간 괜히 심통을 부릴 것만 같아서 일단 집 밖으로 나오긴 했지만 막상 어디를 갈 지 모르는 발걸음은 멈칫거리기만 한다. 참, 고추밭 옆에 커다란 돌 같은 게 있었지. 어릴 적부터 아부지한테 혼나거나 하면 항상 거기 가서 위로 올라가 누워 있곤 했다. 내가 잘못한 일이라도, 그 곳에 가면 일단 내 편을 들어 주고 나를 위로해주는 기분이 들어 좋았다. 나중엔 단순한 고민이 생겨도, 더 나중엔 그냥 습관적으로 가서 누워 있곤 했다. 누워 있으면 눈앞 시야엔 파란 하늘만 가득하다. 간간이 떠 가는 하얀 구름들이 시간이 멈춘 게 아니라는 걸 일깨워준다. 언젠가 나 누워 있는 걸 옆집 석현이 녀석이 보고는 가끔 자기도 올라가 누워 있는 거 같더라. 우리는 그 돌을 하늘 보는 데라고 불렀다. 물론 하늘이야 어디서 보든 똑같은 색깔을 우리에게 내려 보이겠지만 그 곳에 누워서 바라보는 하늘은 정말 마음을 달래주는 그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무슨 짓을 했든, 무슨 고민을 갖고 왔든 다 이해하고 다 괜찮다는 듯이 품어주는 그 넓은 하늘이, 난 좋았다.
오늘도 하늘은 여전하다. 뉘엿뉘엿 슬슬 저물어 보려고 태양도 눈치 보는 저녁. 낮 때처럼 얼굴 간지러운 햇살은 주지 못하지만 이렇게 눈 감고 누워 있으면 그래도 모든 고민이 다 부질없는 일만 같다. 간간히 부는 시원한 바람도 좋고 .. 뭐가 급한지 벌써 나타나 저쪽 하늘에 떠 있는 반달도 그냥 좋고. 돌이 은근 높이도 있고 가운데 부분이 조금 움푹하게 패어 있어 이렇게 위에 하늘보고 누워 있으면 지나다니는 사람이 볼 때 잘 보이지가 않았다. 덕분에 이 위에 올라오고 나면 다른 사람에게 간섭을 받거나 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러다 살짝 선잠이 들었을 때 가끔 석현이 녀석이 와서 깨우거나 한 적은 있었지만. 문득 가슴이 부풀어 터질 때까지 숨을 들이 마셨다가 천천히 내뱉어 본다. 이게 좋다. 이 느낌. 여기 와서 누워 있으면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아도 이렇게 그냥 마음이 차분히 정리가 되는 듯한 이 느낌이 좋다. 우리 집인지, 다른 집인지 바람타고 슬금슬금 마을 떠다니는 고슬고슬 밥 짓는 내음이 전해져 온다. 그러고 보니 오늘 점심도 못 먹었구나. 갑자기 몰려오는 허기에 집에 가서 밥이나 먹자 생각에 읏차 몸을 일으키는데 옆에 갑자기 큰 형이 서 있다.
- 워매 놀래라 .. 언제부터 거기 있었당가?
- 최필두.
- 왔으믄 왔다고 말을 하제 .. 깜짝 놀래부렀소.
- 야, 최필두 !!!
놀래라. 돌에서 뛰어내리려다 고개를 드니 큰 형은 뭔가 화가 잔뜩 나 있는 표정이다. 음? 뭐 때문에 저러는 걸까. 아 .. 혹시 어제 형이 벗어놓은 교복 잠깐 한 번 입어봤던 게 들킨 건가? 그럴 리가 없는데 .. 조심스럽게 한 번 걸쳐만 보고 다시 원래 걸려 있던 그대로 걸어 놨는데 .. 아. 모자. 모자를 그냥 내가 책상에 올려 놨었던가? 아니 걸어놨던 거 같은데 .. 기억이 뿌옇다. 혹시 그거 보고 안 건가? 아이고 .. 골치 아프게 됐네. 어떻게 얘기해야 할래나.
- 아, 그거 내가 손댈라고 한 게 아니고 ..
- 너 고등학교 안 간다 그랬다매.
엇. .. 아, 집에 들렀다 왔구나. 어무이가 얘기하셨나 보네. 교복 얘기가 아닌가 보다. 그래도 큰 형이라고 형한테 바로 얘기하셨구나 .. 뭐 .. 내가 나중에 돈 벌어서 가면 되지 .. 그러니 그렇게 미안해 하지 마소 .. 난 얼굴이 굳어 있어서 화난 건 줄 알았잖아. 난 또 뭐라고 .. 갑작스런 큰 형의 등장에 잠시 잊고 있었던 허기가 다시 돌아온다.
- 아~그거, 뭐 내가 나중에 돈 ..
- 그렇게 공부가 하기 싫냐?
왈칵. 참 이상한 일이다. 내심 이제 진정됐다고 생각했고, 또 그래 나중에 내가 벌어서 가지 뭐 마음도 다 다독였다고 생각했는데 저 한 마디. 저 한 마디에 왈칵 솟아버린 눈물은 순식간에 내 눈을 가득 메운다. 뭐라고 대꾸하고 싶은데 .. 자꾸 가슴이 먹먹하게 막혀와서 말이 안 나온다. 공부가 하기 싫냐고? 그렇게 공부가 하기 싫냐고?
- 너는 저렇게 고생하시는 부모님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냐? 뭐? 학교 그만두고 돈을 벌어? 어무이한테 그게 할 소리야?
그래도 어릴 적엔 잘 놀아주고 의젓했던 큰 형이라 서운하긴 했어도 밉거나 그런 적은 지금껏 한 번도 없었는데. 지금은 눈 앞에 있는 큰 형이 너무 밉다. 그냥 밉다. 그만. 멈춰. 가득 메우다 못한 눈물이 결국 주륵 뺨을 타고 흐른다.
- 싫으면 가지 마, 이 자식아. 네가 가기 싫다고 한 거니까 나중에 딴 소리나 하지 말고. 다 큰 줄 알았더니 아직도 철이 덜 들어가지고 .. 들어와서 밥이나 먹던지 말던지.
자기 할 말만 하고 홱 돌아서 집으로 향하는 큰 형 뒷모습이 무섭도록 남 같다. 아니, 정작 무서운 건 그렇게 공부가 하기 싫냐는 그 한 마디. 마음 정리 마치고 기분 좋게 저녁먹으러 가려던 나였는데 .. 그 한 마디가 이렇게 가슴이 에이고 찢어진다. 말 한 마디가 이렇게 서럽고 아프다. 먹먹하던 가슴은 점차 들썩이며 서운함을, 울분을 밖으로 토해내기 시작한다. 울고 싶지 않은데, 약해지고 싶지 않은데 한 번 발동이 걸린 들썩임은 쉬이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아니, 멈추기는 커녕 점점 격해지며 숨쉬기조차 곤란하게 만든다. 그나마 소리를 겉으로 내지 않으려 이를 악물고 끅끅대며 참는 건 마지막 남은 내 자존심이다.
돌 위에 앉아 울고 있다니. 남자 나이 열 여섯에 동네 우세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혹시 아는 동네 어른이 지나가다 보기라도 할까 눈물 쓱 훔치고 다시 돌 위에 하늘 바라보고 누워 보지만 이내 눈물이 가득 차오른다. 그래, 큰 형이 참 생각이 짧네. 나이 어린 네가 생각하는 게 더 낫구나. 울지 마라. 나중에 네가 더 잘 되어서 부모님께도 더 잘 하고 하면 되지. 서러운데 다독여 주면 더 왈칵하는 게 사람인지라. 평소보다 더 많은 구름 띄워보내며 날 위로해주는 하늘은 오늘따라 더 듬직하게 내 편을 들어준다. 하지만 자꾸만 구름과 뒤섞여 눈 앞 뿌얘지는 잿빛 하늘은 어두워지는 하늘 탓인 건지, 아직 어린 내 나이 탓인 건지.
1969년 가을,
하늘이 유난히 맑던 그 시절.
나는 이제 열 여섯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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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GON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