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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KS/소설2005/10/25 12:28
- 하나ㅡ둘ㅡ왼발, 왼발, 왼발, 왼발.

조교의 귀찮은 듯한 선창에 맞춰 막사로 돌아가는 길. 겨울이라 그런지 벌써 한밤중인 듯 캄캄하다. 오늘따라 바람도 이상하게 장난이 아니다. 옷을 아무리 껴 입었다고 해도 이렇듯 하루 종일 돌아 다니면 아무 소용이 없다. 사회 있을 때는 그나마 추위는 별로 안 타는 체질이었는데 왜 이리 됐지. 그래도 아까 성당에서 몰래 챙겨 넣은 초코파이 2개가 그저 마음 든든하다. 언제 먹을까나 .. 근무 끝나면 같이 선 녀석이랑 먹어야겠다. 녀석 .. 날 은인으로 모시겠군. 크크.

여느 때처럼 씻고 청소하고 나니 모두들 제자리에 앉아 대기하란다. 시키는대로 앉아 옆에 녀석들과 또 장난치고 웃고 떠든다. 이제 내일이면 교육연대로 가는 구나 .. 진정한 훈련소의 시작이네 .. 음 .. 6주..라고 그랬나. 조교들은 많이 다를래나. 이렇게 추운데 어떻게 밖에서 훈련들을 하지 .. 으 .. 생각만 해도 너무 싫다. 비슷비슷한 이런 저런 얘기들을 하고 있는데 아까 조교들에게 불려갔던 몇 명이 박스들을 한아름씩 들고 내무실에 들어 온다. 그리고는 앉아 있는 우리들에게 하나씩 나눠 주는데 뒤따라 들어오는 조교의 고함 소리.

- 지금부터 입대 당시에 입고 왔던 사복을 모두 이 박스 안에 집어 넣는다. 시간은 넉넉히 5분 주겠다. 5분 뒤에 테이프로 봉하고 주소를 적을 예정이니 그 때까지 모두 옷을 넣고 대기할 수 있도록. 그리고 소포 안에는 어떤 편지나 쪽찌, 일절 허용되지 않는다. 소포 붙이기 전에 모두 일괄적으로 확인을 거칠테니 헛수작들 부리지 마라. 규정이니 따를 수 있도록 하고. 마찬 가지로 박스 내외 일절의 낙서 허용되지 않는다. 명심하고 기억해라. 괜히 허튼 짓 하다 걸리는 놈은 가만 안 둔다. 분명 경고했다. 그럼 .. 지금부터 3분 준다. 실시!
- 시..실시!!

모두들 용수철처럼 튕겨 일어나 관물대 위에 올려 놓은 사복들을 내려다 박스에 허겁지겁 집어 넣는다. 그..그러고보니 3분?? 처음엔 5분이라매 이 자식아. 네가 얘기하다가 2분 지난 거 아냐. 이런 개사기꾼 자식. 구겨 넣으니 더 부피를 차지하고. 애써 이리저리 접어서 넣어 보려 하지만 힘들긴 마찬가지다. 아무래도 겨울이라 겉옷을 모두 두툼한 것들을 입고 왔을 텐데. 이 박스는 인간적으로 너무 작잖아. 좀 더 큰 박스는 없나? 한 번 물어볼까나 ..

- 201번 훈련병 OOO, 질문 있습니다 !!

그 순간 어떤 다른 녀석이 먼저 손을 번쩍 들고 소리쳤다.

- 뭐냐?
- 옷이 너무 커서 들어가지 않습니다! 더 큰 박스는 없습니까?

순간 3초간의 정적. 직감적으로 모두들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끼고 정신없이 옷을 집어 넣던 그 손동작들이 모두 멈칫했고 나 역시 큰일날 뻔 했다라는 생각에 다행이라는 느낌만 머리 속을 가득 채웠다. 짧은 그 정적을 깬 건 깔릴 대로 깔린 조교의 목소리.

- ....내가 집어 넣어서 들어가면 어떻할래.
- ..............

이미 조교와 녀석의 사이에 흐르는 냉기류는 우리의 관심 밖이었다. 녀석에겐 조금 미안한 일이지만, 괜한 불똥이 내무실 전체로 튀어 버리면 우리까지 힘들어 지거든. 그러게 왜 괜한 소리를 해서 .. 언제 그랬냐는 듯 잠깐 멈칫했던 녀석들은 모두 다시 정신없이 아까처럼, 아니 오히려 더 오버해서 미친 듯이 옷을 마구 쑤셔 담는다. 우리는 문제 없습니다-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기라도 하려는 듯이. 저희는 모두 거뜬히 한 박스 안에 넣을 수 있습니다-라는 것을, 그것도 3분안에 최대한 빨리 끝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라는 걸 확인이라도 받으려는 듯이.

- 아..아닙니다! 다시 집어 넣겠습니다!

의외로 별말없이 조용히 넘어가는 조교 녀석. 괜히 내무실 전체로 불똥이라도 튀는 건 아닌가 고민했는데 다행이다. 질문했던 녀석도 얼굴 벌개진채 마구 쑤셔 넣으려 발악을 한다.

- 1분 남았다.

엣?? 벌써? 이거 어찌 해도 안 들어가는데 어떡하지? 박스 찢어지겠다 .. 차라리 옷만 넣는 거면 괜찮을 텐데. 신발까지 있으니 이건 부피가 장난이 아니다. 옷이 신발에 묻어 더러워지던 말던 상관 없다. 이미 이건 내 옷이 아니고, 지금 내겐 어떻게 해서든 이 박스를 닫는 것만이 최고로 중요하다. 그래도 무릎으로 누르고 억지로 옆 박스 날개 당겨서 눌러 닫고 주먹으로 치고 발악을 하니 어찌어찌 닫히는 것 같긴 하다.

- 기상.

휴우, 다 했다. 아슬아슬하긴 했어도 다 했다. 보십시오, 난 다 했습니다. 아까 청소 끝나고 앉아 있을 때만 해도 춥던 내무실이었는데 지금 모두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다. 얼핏 대충 곁눈질로 상황 살펴 보니 미처 다 못 집어 넣은 녀석들이 너댓명 정도 있다. 시간이 부족한 게 아니라 .. 녀석들 옷이 너무 부피가 컸다. 패딩이라니 .. 패딩 하나만 넣어도 박스 꽉 차겠다.

- 엎어져.

결국 시간을 못 지킨 녀석들은 바로 다시 엎드리고, 어찌 됐건 시간 안에 모두 박스에 다 채워 넣고 입구도 엇갈리게 잘 닫은 우리는 모두 제 자리에 일정 간격으로 앉아 있다. 각자 앞엔 자기가 싼 사복 박스를 하나씩 두고. 몰랐는데 팔찌처럼 팔에 끼고 있던 노란 박스 테이프를 하나 빼더니 끝을 찾아 조금 떼어낸 후 맨 끝에 녀석 박스 한쪽 끝에 붙이더니 그대로 들고 성큼성큼 걸어가 한 줄 반대편 끝에 앉은 녀석 박스까지 한 큐로 찌이익 소리를 내며 붙여 버린다. 그리고는 돌아오며 반대 손에 쥐고 있던 커터칼로 박스 사이사이 간격의 중간쯤을 똑똑똑 끊는다. 감탄밖에 안 나온다. 하긴 .. 녀석도 상병이니 이 짓만 몇 번을 했겠냐. 그것도 3일 간격으로 .. 조금 말귀 알아 들을 정도 되면 녀석들 교육 연대 가 버리고, 조금 말귀 알아 들을 정도 되면 교육 연대 가 버리고. 짜증이 나긴 하겠다.

그렇게 박스를 붙이고 나서 이번엔 받을 곳 부모님 주소를 쓴다. 첫 날 지급받은 모나미 153볼펜으로 정성껏 글씨를 쓴다. 흘끗 보니 아까 엎어져 있던 녀석들도 언제 마무리 했는지 어느새 같이 주소를 쓰고 있다.

- 주.소.만. 써라. 딴 짓하다 걸리는 놈은 가만 안 둔다.

뭘 저리 강조를 하나. 뭐 맞는다고 쓰기라도 할 까봐 그러나. 화장실에 갈 때도 절대 혼자서는 못 가고. 자살 어쩌구 하는 거에 너무 민감한 듯 싶다. 다들 군생활 빨리 끝내 버리려 왔지 누가 자살 하러 왔냐. 흠 .. 대충 눈치를 봐서 나도 쪼가리 하나나 써서 박스에 몰래 넣을까나. 말이 그렇지 테이프까지 붙인 걸 어떻게 다 뜯어 볼거야 지네가. 관물대에서 볼펜 찾는 척 하며 종이 쪼가리를 살짝 찢어냈다. 전 잘 지냅니다. 이거라도 써서 보내볼까. 크크. 무슨 조난 구조 신호 같잖아. 마치 여기는 대한민국이 아닌 듯한 착각이 인다.

그런데 .. 아까부터 조교 녀석이 바로 내 앞에 의자 놓고 앉아 있다. 의자 앉은 채로 손 내밀면 내 머리 잡힐 정도? 뭐 .. 짧아서 잡히지도 않겠지만. 그나저나 왜 하필 내 앞이야 .. 제기랄 놈아 .. 나도 조난 신호 한 번 보내보자 좀. 뭐 .. 그래도 한 번 해 봐야지. 자 .. 보자. 녀석이 앞에는 앉아 있지만 원래 등잔 밑이 어둡다고, 오히려 신경을 안 쓸 수도 있단 말이지. 슬슬 눈치 봐 가며 종이 쪼가리에 정말로 딱 여섯 글자 썼다. 전 잘 지냅니다. 자 이제 이걸 박스에 집어 넣기만 하면 되는데에 .. 무심코 옆을 보는데 옆엣 녀석도 몰래 기회를 살피고 있다. 그러다 고개 돌린 녀석과 눈이 마주쳤고 그 녀석, 나를 보고 씨익 웃는다. 크크. 너도 눈치 보고 있구나. 나도 마주 보고 웃어 주려는 순간.

퍼억.

일어난 조교가 일어나며 그대로 녀석의 박스를 발로 걷어차 버렸다. 그 녀석이나, 나나. 아마도 모두들 똑같이 메세지를 전하려 고민하고 있었을 다른 녀석들이나. 너무 놀라 멍하게 있는데 조교가 이번엔 내 뒤통수를 갈긴다. 이 놈아, 안 그래도 머리 두상 안 이쁘단 말이다. 갑자기 일어난 상황에 그저 멍하다.

- 이런 XX할 것들을 봤나 .. 연애하냐 니네? 뭘 좋다고 둘이 히죽거려? 니 새끼는 뭘 아까부터 그리 눈치를 봐? 손에 그거 뭐야? 손 안 펴?

저런 저런, 녀석은 쪽찌까지 걸렸다. 나도 모르게 슬그머니 몰래 주머니로 쪽찌를 집어 넣고 손을 편 채로 내려 보인다. 마치 저는 아무 것도 안 했어요라고 광고라도 하듯이. 유치원생도 아니고. 웃기지만 어쩔 수 없다. 내 두상 여기서 더 망가지면 괴물 소리 들을 텐데.

- 내가 이딴 거 쓰라고 했냐, 안 했냐.
- 아..안 하셨습니다!
- 내 말이 X같냐? 이런 XX 놈의 셰끼가 .. 미쳤냐? 어?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내무실 별로 별 짓도 안 했는데 한 두 녀석씩은 모두 비슷한 경험을 했단다. 이른바 시범 케이스. 그걸 우리 내무실에선 나랑 옆에 녀석이 총대를 맨 셈이 된 거다. 운도 지지리 없지.

- 다른 놈들도 잘 들어라. 이번 거는 지금 시간도 없고 정신 없으니 그냥 봐 주는데 또 지랄하는 놈 있으면 그 땐 가만 안 둔다. 알았냐?
- 예! 알겠습니다!
- 주소 다 쓴 박스는 문쪽에 앉은 놈 넷이서 중앙 복도 행정실 앞으로 갖다 놓는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바로 취침 준비할 수 있도록. 불침번 초번 근무자는 바로 투입 준비해서 일직사관 앞으로 55분까지 올 것. 이상.

우르르르.

이젠 말 한 마디 한 마디 떨어질 때마다 제법 군인처럼 각도 나오는 것 같고 재빨리 재빨리 행동하려는 모습들이 자연스럽다. 학교 다닐 때엔 너무 느리게 걷는다고 구박 참 많이 받았는데. 이리저리 두리번 거릴 거 다 두리번 거리고 뭐가 그리 여유만만이냐고 소리 듣고 다녔었는데. 이젠 왠지 그러기가 불안하다. 2년 뒤엔 .. 다시 그 잃어버린 여유, 꼭 되찾을 거다. 누가 뭐라 해도.

이래저래 자리를 펴고 소등하고 누워 있자니 또 오만 생각이 다 찾아든다. 이젠 여기도 마지막 밤이구나. 이틀이긴 해도 그나마 제일 좀 지리도 조금이나마 익숙해지고 하루 사이클도 좀 알겠는데. 또 완전 생판 모르는 곳으로 이동하는 구만. 옆엣 녀석들도 같이 갔으면 좋겠다. 아무래도 전혀 모르는 녀석들 보다는 .. 조금이나마 친해진 녀석들하고 가는 편이 .. 내일이면 교육 연대로 이동이구나. 진정한 훈련의 시작이네. 거기서 6주 교육이 끝나면 자대로 가고 .. 자대가 더 좋을까 훈련소가 더 좋을까? 6주 교육이라는 말만 들었지 실제로 뭘 하는 지도 잘 모르는데 .. 총도 바로 쏘나? ..궁금한 것 투성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오기 전에 예비역 형들한테 좀 물어 보고 좀 많이 알아 보고 올 것을 .. 뭐 가면 다 하겠지만서도 .. 내일 오전은 뭐할래나. 당장 다음 날에 뭘 하는지도 모르고 끌려다니는 생활. 가장 힘든 건 몸이 힘든게 아니라,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이 불안감인 듯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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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GONS